"우리 그만 할래?" 이별 통보를 먼저 한 건 그녀였다. "그래." 나는 그 때 "우리 그만 갈래?"로 알아들었다. 카페에서 나가자는 말인 줄 알고 그녀의 제안을 쉽게 수락했다. "알았어." 그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손가방을 들고 나갔다. 그게 그녀와의 관계의 끝이었고, 나는 그날 밤, 밴드 넬의 《Separation Anxiety》 앨범을 돌리면서 훌쩍...
벌판에는 죽음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 땅이 이만큼의 죽음을 수용할 만큼 크다는 사실도 새삼 느꼈다. "충인." 그 가운데, 유난히 생명의 불빛을 밝게 밝히는 이가 있었다. "다 끝난 거야?"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고, 피와 흙으로 얼룩진 얼굴에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감추고 싶었지만 손이 너무 더...
"내 천국 내놔." 그것이, 졸지에 영혼을 리부팅당한 내 자신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냥 여기가 천국이라고 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너무 답답하게 굴지 마십시오.] 이 인공지능은 정말 무섭게 성장했다. "애초에 나는 평범하게 죽을 예정이었어. 천국 가면서 사랑하는 모두하고 굿바이하면서. 그렇게 예수님 곁으로―" [그건 더 나중이어도 상관없지 ...
두려움이란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낸 혼란과 함께 승화되어갔다. 포성과 함께 흩뿌려지는 피는 더 이상 시선을 흔들지 못하는 배경의 일부가 되었다. 시야도, 시력도 다를 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주위는 모호하게 보였다. 생각할 겨를 없이 일은 전개되었다. 오랜 밤을 새워가며 세운 계획들은 경비병들의 외침 하나하나에 빠르게 녹아내려갔고,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숫자가 나열돼있는 저 판 보이지?" 여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물론 보였다. 아까부터 거슬렸다. 숫자가 무작위로 배열된 흰 보드판은 여자의 뒤에서 쭉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사람의 수명을 결정하는 거란다." 난 시력 검사표인 줄 알았다. "내가 입교했을 당시에, 교주님이 이걸 가지고 우리 운명을 예언하셨는데…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가 스스로' 그 운...
연안고등학교 가을 축제에 놀러 갔다. 사회자로부터 '학교의 지하 밴드부'라고 소개받은 "우주미아"의 라이브는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황홀경에 빠뜨려버렸다. 축제의 어중간하고 의무적인 열기를 뭔지 모를 음습한 소리가 뒤덮을 때 누군가 배를 안에서부터 움켜쥐는 듯한 초조감이 드는데, 거기서 어째서인지 기묘한 안심을 느꼈다. 또 격렬한 연주가 갑작스레 쿵 가라앉...
문득 든 의문이다. 아이폰에 내장된 사람 모양 이모티콘을 보면 남성과 여성 각기 피부색별로 백인부터 흑인까지, 중간에 아시안 계열 피부색이 끼워져 다섯 단계로 그라데이션이 되어 있다. 단순히 백인 남성에 국한시키지 않은 애플의 ‘정치적 올바름’ 실천 사례로 볼 수 있겠지만, 뭔가 찝찝하다. 그래서 나는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온 한심한 소리들을 인용하며 머리...
3월에 귀국했다. 4월에 입대하기 때문이다. 기숙사 그 두세 평 될까 말까 한 조그만 방에 쌓아놓은 짐이 얼마나 된다고 귀국 전에 박스를 두 개나 채워 보냈다. 귀국이 싫어 계속 미뤄두고 있다가 이대로는 못 나가겠다 싶을 때 하루 딱 날 잡고 보낼 짐을 싸다보니 밤을 샜다. 심야와 새벽의 경계 언저리에 우체국 방문 집하(集荷) 서비스를 신청하고 그대로 고꾸...
맨눈에 들어온 뿌옇게 바랜 강산아 너무 모호해 한 발짝도 못 떼 아름답구나 널 그대로 보려 해도 번지는 빛에 잡을 손도 입 맞출 얼굴도 그 순간 넌 그 자리에 없고 내게 이룬 세계를 걷다 헛디뎌 넘어져 일으켜 세운 그대 진심 안 보이니 진심인가보다 전적으로 맡긴 삶에 상처만 뚜렷해 기댄 벽의 출처는 내게 쉼을 유혹해 또 고꾸라지는데
들어가 보면 네가 맞이해줄지 접촉면의 온기는 기계열 혹은 나와 같은 체온일 뿐 애초에 그른 만남 후줄근한 태생의 모습과 서툰 손재주와 절망적인 미술 감각은 네 앞에 나를 못 서게 하네 그 변명조차 현기증 나고 랑데부를 꿈꿨던 장소로서의 이상은 표식에서 사람으로 유사하게 칠하다 우상이 되어 다시 착각이 된 현실의 파괴
잠깬 아침 거친 근육 거울 보며 당겨 웃다 틀에 못낀 떫은 표식 찬물 부어 멎듯 졸인 가슴 아래 문자 몇에 끓을 뿐인 요동 않는 설친 밤의 바랜 사진 문득 보니 내일 같아
원과 선의 논쟁은 생각의 위치 차이 시간이란 현상은 빙그르르 또르르 인과를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어느새 돌아보니 주욱 뻗어 여기에 그 최선단에 토옥하고 놓인 우리는 생각보다 조마조마하네요
작가-지망생-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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